2017년 5월 30일 화요일

조선왕조 역대 국왕 편 / 엄친아 문종(文宗)에 대하여

조선왕조 역대 국왕 편 / 엄친아 문종(文宗)에 대하여 


엄친아 문종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문종은 과학자 군주였으며, 미남, 엄친아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조선의 제5대 임금으로 태조-태종-세종-문종 조선 초반 전성기를 이어갔던 임금이다.

이성계의 증손자인 문종은 

많은 매체에서는 계유정난에 다루어지기 때문에 

*계유정난 : 문종이 죽자 맏아들 단종이 12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후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민 일

병약한 모습만 주로 다루어 지지만 (죽기전 모습) 실제로는 많은 업적을 남겼던 왕이다.


--문종의 외모 --

기록에 보면 체격도 크고 수염도 풍성하여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같은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얼굴도 많이 잘생겼었다고 하는데, 병자호란 후에  문종의 어진이라고 추정되는 어진이 나왔으나,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저평가된 명군이라는 평--

 문종(文宗)은 앞서 말했듯이, 여러매체에서 계유정난의 프롤로그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병약한 왕으로 자주 묘사되어 대중에게는 병약한왕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몸이 약한 왕은 아니었다는게 정설이다. 

또한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종대왕의 후반기 정책을 주도했으며 언론의 활성화,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의 여러 업적을 남겼다.

6품이상까지 윤대를 허락, 하급관리들의 말도 무시하지 않고 경청하였다.

*윤대 : 문무 관원이 윤번으로 궁중에 참석하여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 

또한 문종은 군사부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발달시켰다.

태종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했던

안보에 관해 관심이 매우 많았던 왕이었다. 


*화차 : 당시에는 화거라고 불렀으며 
조선초기~조선중기까지 사용되었다.  현대의 로켓형 무기와 비슷하다.

세종대왕의 업적이었던 4군 6진의 정비를 완료한 왕이기도 하며 3군을 정비하여

병력을 증강시킨 왕이다. 






2017년 5월 21일 일요일

조선왕조 역대 국왕 숙종(肅宗)에 대하여

조선왕조 역대 국왕 숙종(肅宗)에 대하여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싸움으로 너무나 약해져 버린 조선왕조의 왕권을 회복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정당을 계속 교체함으로써 왕권을 회복시키는데 더욱 힘을 썼다. 집권 정당을 교체하는 정책을 환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환국도 약점이 있었는데, 정치세력(집권정당, 비 집권정당)을 철저히 이용했어야 했으므로 숙종의 왕권이 끝나게 되면 무용지물화 되어버리는 정책이었다.

때문에 절대왕권은 숙종에서 끝나게 되었다.

앞서 밝혔던 것 처럼 조선왕조 중 가장 당쟁이 심했던 시기를 왕의 정책으로 잘 이끌었다는 평가가 있으며,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평화로운 시기였다.

환국에 대해 더 이야기 해보자면 작가 이덕일은 이런 평가를 했는데

숙종의 정책은 매우 패도정치였다 라고 비판하였는데
숙종이 윤증이 제시한 타협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 그렇게 평하였다.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 없다.'



2017년 5월 13일 토요일

조선왕조 역대국왕 세조(世祖)에 대하여

조선왕조 역대국왕 세조(世祖)에 대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을 완성한 군주이나, 평가가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

세조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세조는 임금이 되기 전 군호인 수양대군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조선 왕조의 기반을 완성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가가 매우 엇갈리는 왕 중 한명으로 군주로 재위했을 당시 

어떤 점에 집중할 것인지에 따라 평가가 갈리게 되는데

폭군과 주권의 강화에 노력한 군주까지 평가가 다양하다.

정권과 정치색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리는데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사레가 

두 차례나 있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관련해서 굉장히 고평가 됐었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1970~80년대의 평가와 1990년대의 평가가 매우 상반된다.

민주주의 정권에 들어서서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권력을 찬탈한 정통성도 없는 암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희대의 패륜아 임금-

세조의 패륜행위는 다른 폭군들에 비할 수도 없는다.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문종의 왕릉을 파헤쳐 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그 무덤에는 현덕왕후와 합장이 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왕가의 두명의 무덤을 파헤친 것이 된 것이다. 

또한 동복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였다.

단종복위모의와 관련해서 자신의 동생들을 죽여버린 것들인데

반란 혐의 만으로 친족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여러 야사에는 많은 백성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야사이기 때문에 사실인지는 모름)

친족을 죽이는데 전혀 꺼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권력에 도전할 만한 존재는 송두리째 뽑아버린 방침을 세웠지만

너무나 잔인했다는 평가는 지울 수 없다. 



세조가 가장 욕을 먹는 문제는 단종관련 문제인데 

세조는 조카를 자기손으로 죽이고 시체 수습도 하지 않았다.

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라고 적어놓았지만

사실은 엄흥도라는 인물이 대신 수습했다. 

(엄흥도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이 세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시신을 돌보지 않았으나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 마련해 장사를 치루었다.
후에는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친촉을 잔인하게 죽여버린 많았으나 세조는 정말 너무했다고 볼 수 있다. 


-왕위 찬탈의 업보-

세조는 자식복이 없었는데 장남은 세조가 왕이되고 3년만에 죽고

차남 예종은 즉위 13개월만에 죽었다. 둘다 20세를 못 넘기고 요절했는데

때문에 자신의 직계자손이 아닌 배다른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왕위를 찬탈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세조의 노력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2017년 5월 12일 금요일

조선의 영대 국왕 세종(世宗) 편

조선의 영대 국왕 세종(世宗) 편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세종에 대해 알아보자.

세종대와은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태종 이방원과 원경황우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막동(莫同)이었다고 하는데, 막동이라는 뜻 답게 막내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은 고려왕조에서 신하로 일하다고 왕위에 오른 세 선왕과는 달리, 

조선시대에 조선사람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라 할 수 있다.

양력생일은 1397년 5월 7일,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15일이다.

스승의 날이 세종대왕의 탄신일인데, 실제로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에서 따와 만든 것이다.

세종대왕은 '글자를 만들어 백성들을 깨우친 한민족의 큰 스승'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셋째 왕자였기 때문에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매우 먼 편이었으나

첫째왕자인 양녕대군의 평소행실 때문에 페세자가 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세종대왕)이 왕통을 잇게 된다.

앞선 포스트에서 태종이 자신의 권력을 다지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장자계승'의 원칙이었다.

본인이 왕위에 오를 때처럼 왕자의 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셋째 아들이 왕통을 잇게 되고 후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됐다.

또한 선왕인 태조가 외척, 친척, 공신을 가리지 않고 정리를 해 놓았기 때문에

세종에게 감히 반기를 드는 신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이 거만, 오만해질 수 있으나 세종대왕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은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업적-

우리가 흔히 알 고 있는 훈민정음 창제 말고도 세종대왕은 많은 업적을 세웠다.

당대의 모든 분야(언어학, 음악, 법학, 공학, 철학, 경제학, 천문학, 군사, 농업)에 신경을 쓴 임금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준을 몇 단계씩 끌어올린 대단한 국왕이다.

그렇기때문에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다보면 세종대왕 파트에서 외워야 할 것이 굉장히 많다 . 수험생들은 원망하겠지만, 이분이 있어 우리선조들이 굉장히 편해졌다는 사실






2017년 5월 11일 목요일

조선왕조 영조(英祖)에 대하여

조선왕조 영조(英祖)에 대하여


조선의 중흥기를 이룩한 명군이자,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어버린 암군 

*세도정치 :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추종세력에 이루어지는 정치 형태
원래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의미하였으나
강력한 권세를 잡은 특정인이 전권을 휘두르는 부정적 형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영조(英祖)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권력자로는 100점이었으나 왕이나 아버지로서는 0점이었던 평가가 많다.


영조는 조선의21대 국왕으로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과 달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 이었다. 때문에 정통성 문제에 계속 시달리게 되는데, 후에도 평생 컴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도 조선 왕 재위기간 중 가장 긴 52년을 재위했으며, 가장 장수한 군주이다. 영조는 83살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평균수명을 생각해보면 정말정말 오래 살았던 것이다.


영조는 대중에게 탕평책과 사도세자의 아버지로 유명한 왕이다. 

정책과 정치는 크게 성공한 권력자이나 가정은 챙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자인 정조에게 평생 상처를 줬다.

-탕평책-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실시했다.
실질적으로 본인에게 정치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더 많이 배치했으나 
실시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사람이 많다.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노론이었으므로, 완전한 탕평책은 아니긴 하다.

-통치 기간-

영조의 통치 기간동안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황폐했던 조선이 완전히 수습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으로 백성들을 통치했다. 백성에게는 너그러웠으나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던 왕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스스로도 굉장히 검소하여 옷을 재활용하였으며 침실에는 이불과 베게, 식사는 밥과 김치, 장류로만 이루어졌다고 이어진다.


-한계-

아버지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였던 영조는 정적이었던 소론이 제거되고 나서도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엄격하게 대했다. 결국 사이가 벌어져 뒤주에 아들을 가둬죽였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2017년 5월 10일 수요일

정조(正祖)의 일대기


정조(正祖)의 일대기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왕이며, 몰락의 씨앗을 남긴 왕

'정조'에 대해 알아봅시다.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이며,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통재이다.

아버지인 영조 28년에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759년(영조 35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 장헌세자가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위를 이었습니다.

1775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이듬해 영조의 사망으로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성군이라고 불리는 정조인데, 재미있는 부분을 알아봅시다.


-정조의 비밀편지-

<정조어찰첩>을 보면 정조는 '학자군주'의 모습보다는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을 구사하곤 하였는데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고 사람꼴도 못 갖춘 새끼랑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못하는 병신이 주둥아리를 놀린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어전 회의 중에 정조는 신하들이 실수를 했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절대로 신하들을 유배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하관 대신 중 한 명이 "전하의 업무 처리 방식은 매우 글러먹으셨는데, 이건 전하의 급한 성질머리 때문이고, 옥체가 자주 편찮으신 것도 전하의 급한 성질머리 때문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무례한 상소였으나

정조는 그 신하를 용서하고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정조의 비밀편지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참 재미있는 부분이죠!?

-정조의 술버릇-

정조는 술과 담배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술은 자주 먹었던 것은 아니고 가끔 먹었는데, 그 가끔 먹을 때마다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술을 마실때마다, 다른사람에게 술을 억지로 권했다고 합니다 

왕이 술을 권하면 절대 거부할 수가 없겠죠?..

그 당시, 술은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음식이었는데,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이 소모되는데 막걸리 한잔이 밥 한끼 정도의 쌀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때문에 정조는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미로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의 글귀를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에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좋은 왕임은 분명하네요 ㅎㅎ 





2017년 5월 9일 화요일

고종 [高宗]의 일생

고종 [高宗]의 일생


고종은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과 헌종의 모후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추존 임금으로 입양되어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조선 제 26대 왕으로, 대한제국 제 1대 황제입니다.

즉위 초기(약 1863~1873) 10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유지하던 과정에서 민씨 일가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여기서 민씨는 명성황후를 칭한다.

1880년대 이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에 개항을 하고

청나라, 일본, 러시아 3국의 3파전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노력한 왕이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 :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도 불리며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했던 사건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뜻에 반하여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시도했다는 그 자체에 의의를 둘 수 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선 그랬다. 

1910년에는 이태왕이 되었다. 

(이태왕이라는 말은 조선의 국격을 깎아 내리기 위한 일본의 의도로
李太王이다.)

후에 1919년 1월 21일 사망한 뒤, 고종 독살설이 유포되기도 했는데
이 일은 후에 1919.3.1 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은 순종으로 (1907~1910)이지만

고종은 조선의 힘이 마지막으로 남아있을 때의 왕이다.